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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성 레오나르도 무리알도 (Saint Leonardo Murialdo)

2009.07.03 03:50 210 SDB
생몰년도 1828 ~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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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레오나르도 무리알도 Santo Leonardo Murialdo (1828-1900)

 

성 레오나르도 무리알도는 돈보스코와 같은 시대를 살면서 돈보스코로부터 성화(聖化)의 길을 배운 또 한 명의 성인이다.

 

그는 돈보스코보다 10여 년이 늦은 1828년 토리노에서 프랑키니 무리알도와 데레사 로 사이에서 8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교양 있고 신앙심 깊은 귀족집안이었다. 불행하게도 그는 5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고, 어머니에게서 상류계층의 전통적인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16살이 되던 해, 사제의 삶이 자신에게 마련되었다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느껴,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토리노대학교의 신학과에 입학하였고, 23살이 되던 1851년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사제가 되었으나 이렇다 할 사목지가 없이 자신의 가정에 머물면서 오라토리오 등을 방문하여 교리를 가르치던 그에게 돈보스코가 성 루이지 오라토리오를 맡아 운영해 줄 것을 부탁한 것이 1857년이었다. 이 오라토리오는 그보다 10년 전인 1847년에 돈보스코가 발도코에 이어 두 번째로 세운 오라토리오로, 그곳에서 무리알도 신부는 가난한 아이들을 위한 돈보스코의 사업을 도우며 1865년까지 8년 동안 헌신적으로 활동했다.

 

귀족가문의 출신으로 서민적인 생활에 익숙지 않았고 지적인 그가 가난하고 거칠며 교양이라곤 찾아 볼 수 없는 아이들과 함께 살며, 그들을 위한 활동에 전적으로 투신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는 섬세하였으며 외적인 왕성한 활동보다는 내적으로 침잠하는 성향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자신의 단점을 극복하려고 무던히 애를 썼던 그는 실제로 오라토리오의 아이들을 위해 자신의 성향까지도 온전히 바쳐가며 성공적인 활동을 하였다. 돈보스코는 무리알도 신부의 영적이고도 교육적인 가능성을 정확하게 진단하였던 것이다.

 

평신도들과 살레시오 신학생들의 도움을 받아 성 루이지 오라토리오를 운영하면서 교리교육과 초등교육, 오락과 인성교육활동 등을 통해 그 어려운 사업의 기초를 확고하게 다졌다. 이 때가 무리알도 신부 자신의 교육적이고 사회적인 성숙을 위한 가장 중요한 시기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돈보스코와 아주 가까이에서 어떻게 그 많은 반대자들을 극복하는지, 매일 만나는 가난한 젊은이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접근하여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는지, 아이들의 사회·경제적 상황들에 어떻게 관여하는지, 어떻게 아이들을 양육하고 그들을 직업의 세계로 이끄는가 하는 것 등을 살펴보고 배웠던 것이다. 그는 위대한 교육자 성인의 방식을 직접 배울 수 있는 이상적인 조건을 아주 적절하게 활용하여, 변두리지역에서 긍휼의 마음으로 노동자들을 위해 일생을 바치겠다는 자신의 소명을 나름대로 키웠다.

 

이런 성찰과 경험을 바탕으로 노동세계에서 복음을 펼칠 수 있는 새로운 방식을 찾고 있던 무리알도 신부는 1866년 파리의 신학교로 가서 다른 신학생들과 똑같이 1년 동안 공부하고 자신의 성소에 대해 깊이 성찰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는 그곳에서 프랑스 교회가 노동자들을 위해 펼치는 많은 활동들을 직접 보고 배우며 큰 감동을 받았다. 다시 토리노로 돌아온 무리알도는 어떤 사제가 운영하다 경영난으로 문을 닫은 한 직업학교를 인수하여 운영하기 시작했다. 180명의 아이들을 먹여 살리고 기술을 가르치기 위해 엄청난 희생이 따랐으나 이미 돈보스코의 곁에서 배운 경험은 그 어려움들을 모두 극복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에게 있어 기술을 가르치는 것만큼이나 큰 걱정은 아이들이 사회에 바르게 진입하여 올바르게 기여하고 합당한 대우를 받도록 돕는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의 사회적 환경은 노동현장의 아이들에게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다. 무리알도 신부의 지원을 받는 ‘가톨릭 노동자회’가 생겨난 동기도 이런 배경을 갖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병들거나 은퇴한 노동자들에게 혜택이 돌아가도록 하는 ‘상호공제회’를 만들었고 주일마다 강연회를 개최하여 가난한 가족들과 노동자들의 의식을 고취하는 일을 벌였으며, 사회에서 그 영향력을 크게 떨치기 시작했던 인쇄매체에도 관심을 기울여 <노동자의 소리>와 <시민의 소리>라는 주간지를 발행하여 당시 열위계층 사람들의 목소리가 되어 주었다.

 

가난한 청소년들을 위한 무리알도의 활동을 돕는 평신도들이 많이 있었는데, 무리알도는 직업학교뿐 아니라 노동계의 청소년들을 위한 여러 사업들의 보다 안정적인 진행과 발전을 위해서는 평신도들의 도움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몇 명의 뜻이 있는 젊은이들을 모아 1873년 ‘성요셉회’라는 수도회를 세운다. 이 수도회를 필두로 하여 무리알도 수녀회, 무리알도 재속회, 무리알도 협력자회 등이 속속 창립되었으며 이 무리알도 가족들은 현재 남미와 아프리카 등에 퍼져나가 창립자의 정신을 따라 많은 활동을 펼치고 있다.

 

1900년 3월 30일, 72세의 일기로 토리노에서 선종하여 올해로 서거 100주년을 맞는 무리알도 신부는, 1970년 5월, 교황 바오로6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돈보스코로부터 가난한 청소년들을 사랑하는 방식을 직접 배웠고, 이를 노동자와 청소년들을 위해서 고스란히 펼쳐 보인 레오나르도 무리알도 성인. 돈보스코의 ‘성인학교’를 실존으로서 증명해 주는 또 하나의 증거가 아닐 수 없다.